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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붓을 손에 쥐었을 때의 감각을 잊지 못합니다. 이미 물을 함뿍 머금은 붓을 뭣도 모르고 먹물에 푸욱 담갔다가 얇고도 질긴 화선지 위에 주욱 그었을 때, 솜이 서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화선지의 질감과 축축이 젖어가는 물의 무게가 찰나에 빽빽한 털을 타고 올라와 좁은 손가락의 끝에서 느껴질 때, 이 사소한 몸의 일부가 이렇게 예민하게 깨어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기분이 듭니다. 형체 없는 선들로 마음을 깨우고 감각을 살리며 농담 조절이니 고른 표현이니 하는 것들을 익히고 나면 지금껏 그어온 수많은 선들이 모여 난초가 됩니다.

 이렇게 무언가를 그릴 수 있게 되면 세상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괜히 집에 돌아와서는 작은 베란다 구석에 초라하게 서 있던 난 화분 앞을 얼쩡거려 보고 길을 가다가도 작은 꽃 하나에 괜히 발걸음을 멈춰 보고 해가 좋은 날엔 따뜻한 빛이 나무에 어떤 그림자를 만드는지 집중하게 되고. 초봄에는 매화와 동백이 고개를 피어나고 한 여름의 밤은 장미의 무대임을 알게 되면 숨죽이고 부지런히 약동하는 세계의 활기에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려요. 마침내 그림을 그리는 이는 순간의 것들을 그 속에서 또 다른 생명력으로 생동하게 하는 정원사가 됩니다. 붓을 잡은 모든 이는 흘러가는 기억의 찰나를 붙들어 자그마 한 정원을 한 칸 한 칸 정성스레 가꿔나가는 또 다른 세계의 주인입니다.

 우리 한국화회도 하나의 커다란 정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꿈을, 우리의 애정을, 우리의 행복을 여기서 한 칸 한 칸 채워나갑니다. 당신은 누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이곳에 왔나요? 얼핏 똑같아 보이는 꽃들과 잎사귀가 흐드러져 있다 해도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정원사는 제 작품에 영혼의 일부를 남기기 마련이니 그저 유심히 바라보고만 있으면 모두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될 테니까요.

 여기 정원의 여왕인 꽃들이 제 빛깔을 뽐내고 있습니다. 작은 벌과 부드러운 털을 가진 짐승도 있습니다. 완벽을 위해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강한 인내를 보이는 어떤 이의 성정은 섬세하게 음영진 투명한 벌의 날개에서 바림으로 차분하게 겹겹이 쌓아올린 청초한 꽃잎에 떠오릅니다. 어느 것 하나 져주질 않아 서로 부딪치는 강렬한 원색을 확실한 선으로 재단하면서도 어떻게든 조화시킨 새와 꽃을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든 세상을 명확하게 보고 싶어 하는 고집 센 이의 모습이 마음에 그려집니다. 또 이지러지는 인상 속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시선으로 당신을 쳐다보는 호랑이에서 주인의 거침없는 추진력과 뚝심이 숨겨지지 않는가 하면 어딘가를 순하게 바라보는 호랑이의 세심하고 부드러운 털이나 수염 그리고 옆선에서 제 주인의 점잖고 신중한 면모가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남겨진 누군가의 족적을 좇아 그릴 때에도 마찬가집니다. 일렁이는 물결도, 단단한 바위도, 그 위에 올라선 매도 다시금 그려지는 순간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 됩니다. 모양도 색도 어느 하나 같은 것 없는 밤거리의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처럼 따뜻한 나의 꿈과 너의 꿈, 우리의 꿈이 모일 때, 이 삭막한 콘크리트 공간도 하나의 정원이 되고 커다란 마을이 되어 은빛 금빛 빛무리로 달까지 높이 높이 닿을 거예요. 당신은 그저 작지만 달보다 큰 무한한 생명의 정원에서 마음껏 꿈꾸며 거닐어 주세요. 이 정원에서는 때때로 당신의 마음과 공명하는 작품을 마주하는 행운이 함께하기도 한답니다. 그때, 어쩌면 당신은 당신이 미처 몰랐던 당신 속의 색을 발견하게 될지도 몰라요. 이제, 떠나볼까요?

2018131006 독어독문학과 강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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